커다란 스피커에서 익숙한 재즈 연주곡이 흘러나오는(이 가게에는 흘러나오는 이라는 표현이 실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주 큰 볼륨이 가게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에 흘러나온다기보다 천둥처럼 울리고 있어서.) 을지로의 카페에 앉아있다. 나는 12팀의 대기를 기다려 우래옥의 평양냉면을 먹고 곧이어 도착한 친구와 냉면집에 어울리는 대화(가슴과 비키니와 누드비치와 몸을 3분 안에 그려야 해서 흥분할 시간 따위 없었던 미술학도 이야기, 모든 몸이 그저 몸이어서 모두가 같은 화장실과 목욕탕을 쓰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카페로 걸어오는 길에는 연예인의 ‘관리’가 일반인에게까지 퍼져버려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에게 보톡스가 익숙해서 보톡스를 권하는 언니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언니는 어디서 만나요?” “동네에서요.” “동네?”..
다시 콧물이 나기 시작한다. 추워졌다는 뜻이다. 아직 춥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바깥 풍경 속 사람들은 여전히 짧은 소매와 짧은 바지 차림이다. 침대에서 나오면서 하는 재채기가 추워진 계절 때문인지 겨울용 이불의 먼지 때문인지 너무 알고 싶다. (먼지 안 나는 이불 커버를 찾아다닌 지 어언 오억년.) 실험을 해볼 수도 없는 게 쌀쌀한 날씨와 두꺼운 이불은 무조건 동시인 탓에 한 쪽을 통제하기가 어렵다. 오늘 밤엔 전기요를 세게 틀고 얇은 이불을 덮어 봐?창문을 열어놓을 수 없는 계절이 되는 게 아쉽다. 아침이면 학생들의 등교 소리, 교통 지도 소리, 어린이집 아가들의 산책 소리, 주말이면 창 밖 배드민턴 장에서 노는 소리.. 대개는 개미 한 마리 없어 의 단지 내 풍경이긴 해도 이런저런 소리들이 들리는 ..
올 여름이 남은 여름 중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는 말이 너무 무서운아무래도 이런 날씨에는 야외 노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에어컨을 도저히 끌 수 없어 켠 채로 잠시 창을 열어 환기를 해야만 하는이 여름에종일 집에 책상 앞에 앉아 거북이처럼 걸어간다 효율이 너무 나빠 일하는 시간 세 시간을 위해서 날아가는 시간이 열 시간쯤은 드는 것 같다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어쨌거나 붙들어야 하는 시간을 위해 종일 집에 책상 앞에 앉아시간을 붙든다 밤거리를 걷고 싶어버스정류장을 지나치고 도시의 불빛을 눈에 담고 싶어그러지 못하는 나날인 건사는 동네가 달라졌기 때문만은 아닐 거야
개강까지 이 주가 남았다. 기다리는 시간은 늘 천천히 가서, 나는 조금은 불안하고 그러면서도 늘어지는 날들을 보낸다. 개강하면 많은 게 폭풍처럼 밀어닥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에게 크게 요구되는 게 없는, 그러니까 알아서 찾아서 하면 할 것들이 많겠지만 그게 정해져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얼마큼 나의 일을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나는 나를 보호하는 데 이력이 나서, 내가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치지 않을 정도로 병들지 않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만 나를 몰아붙일 것이고 거기에는 몰아붙인다는 말을 붙이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많이 쓰러져봤기 때문에 쓰러지는 게 어떤 건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미리 몸을 사리는 거라고 주장하지만 때로는 태우의 말처럼 그것이 과잉 보호..
내 방 한달살기를 시작하는 첫 날. 나에게는 시간적 규칙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점심 시간 전 11시에 샤워하면서 했다. 원래라면 절대로 씻지 않을 기분의 타이밍이었으니까. 그 안의 시간을 어떻게 채우는지는 자유지만, 일어나는 시각, 밥 먹는 시각, 샤워하는, 산책하는, 잠드는 시각이 정해져 있는 것. 원주에서의 생활이 이렇게 도움이 된다. 그때를 떠올리며 아무것도 없는 내 하루 시간의 틀을 잡는다. 그래, 오후 두 시 십 분, 지금 딱 졸릴 시간이었어. 이천이십사 년 일월, 일 년의 1/12. 이 귀한 시간.
-사날은 참 긴장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제가요? 저 긴장해요. -물어보면 긴장된다고 하긴 하는데 먼저 드러내진 않고. 긴장하는 것 같지 않아 보여요. -아, 그건 감정 마비 때문에 그래요. 같이 조금 웃다가 -원래 좀 덤덤한 편이긴 해요. 덧붙인다. 그렇지만 긴장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긴장해서 무대를 망쳐버렸던 적이 있거든요. 심장이 마구 뛸 때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께를 지그시 눌러요. 그러고는 손바닥에 전해지는 심장 박동을 느껴요. 쿠궁 쿠궁 쿠궁 쿠궁 거기에 집중하다보면 서서히, 가라앉을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진 않아요. 그래도 그럴 때 대응하는 나만의 의식이 있다는 점에서 조금 안도하게 돼요. 그때는, 내가 망쳐버린 그때에는 손을 올려놓는 나만의 의식이 없었어요. 내가 긴장하는지도 몰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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