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자유를 배신하고 법치주의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고, 지속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사랑 자체를 배신한다. 사랑은 나 스스로 만든 환상을 깨뜨려서 나 자신까지도 배신한다.
사랑에서 환상을 깨는 것이 배신의 역할이다. 환상이 하나하나 깨지는 것이 바로 사랑이 완결되어가는 과정이라면, 사랑은 배신에 의해 완성되는 셈이다.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아무리 집착해도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 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현석은 자신이 그런 인상으로 보여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에 의해 그려진, 아름답지만 나약한 자기의 모습을 싫어했다. 그러나 어떻게 한들 자신의 용모가 강인한 인상을 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한 방법으로 언제나 시니컬한 표정을 짓는다. 그 의도가 늘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냉정하고 거만해 보이는 표정 어딘가에 부자연스러운 자기 불안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냉소로 위장된 소심함이란 바로 저런 표정이구나 하고 생각하곤 한다.


외로움의 해소는 애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부부의 정사와 아버지의 죽음, 그 두 사건 사이에는 개연성도 인과 관계도 없다. 그런데도 그 우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고통받아야만 한다면 논리학에서 말하는 '근거 없는 비난 오류'가 아닐까.


그는 내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현석뿐만이 아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 역시 나를 자신있고 강하게 본다. 하지만 언제나 잘못될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을 완전히 던지지 않는 것을 강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삶을 불신하기 때문에 늘 불행에 대한 예상을 하고 그 긴장을 잃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겉으로는 강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몰라도 실은 나의 가장 비겁한 면이다. 어떤 일에 자기의 전부를 바친다면 그것만으로 그의 삶은 광채를 얻는다. 하지만 나는 내 전부를 바친 일, 그 끝에 잠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파탄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나 자신의 삶까지도 관객처럼 거리 밖에서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잘못 행동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험 속에 머물게 마련이다.

이따금 나는 내가 왜 현석을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곤 한다. (...) 사랑하는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비로소 사랑한다고 말해도 되는 게 아닐까. (...) 이유가 있는 사랑은 상대로 하여금 이유를 제공해야 하는 부담을 준다. 사랑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 사려깊은 불안이나 비탄보다 철없이 행복을 먼저 취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윤선의 능력이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아닌지 따져보는 데에 사랑할 시간을 다 써버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사랑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오는 운명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사랑을 하고 안 하고는 취향이며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엄연한 능력이다.


누구나 마지막 춤 상대가 되기를 원한다. 마지막 사랑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마지막이 언제 오는지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음악이 언제 끊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마지막 춤의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상대와의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 추는 방법이다.
Posted by d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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