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2009. 9. 27. 23:22


 "영훈아, 맥주 한 잔 줘."
 퇴근길, 오늘도 어김없이 친구가 운영하는 신촌의 한 술집에 들른다. 집에 가기 전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하고 가는 일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건 친구가 자그마한 술집을 하면서부터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친구네 가게에는 손님들이 꽤 있다. 영훈이와 나는 대학생 때 같은 동아리에서 만난 사이라 종종 영훈네 가게에 동아리 친구들이 오곤 하는데 오늘은 웬일로 아는 얼굴은 없다. 영훈이는 이리저리 손님들에게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지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가져다주며 말없이 어깨를 툭 치고는 또 바쁘게 움직인다.
 
 바텐더와 마주보는 긴 탁자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쭉 들이켜고 나니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 맥주 한 잔으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지금껏 이 즐거움을 왜 제대로 알지 못했을까? 서른이 넘어서야 진정한 맥주의 맛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이십 대에도 술을 자주 마시긴 했지만 그 때는 술이 맛있어서 마신다기보단 오히려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고등학교 동창회, 대학교 동아리 모임, 수업을 같이 듣는 팀원들과의 뒤풀이 등 모든 만남은 주로 저녁때였고 밥을 먹고 술집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즐거운 분위기 때문에 술자리를 좋아하긴 했지만 술 자체를 즐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술, 특히 하루 일과를 마치고 시원하게 한잔하는 맥주의 참맛을 알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쁨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엾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맥주 몇 잔을 비웠을 때 옆자리에 앉은 한 남자가 혼자 마시기 심심했는지 말을 걸어온다. 오늘은 영훈이가 바쁘니까 무료함도 달랠 겸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맥주 맛에 대한 이야기부터 가게 인테리어에 대한 이야기, 날씨 이야기, 경제상황에 대한 이야기 등으로 이어지는 대화가 퍽 즐겁다. 그러는 동안 가게 안의 손님들이 하나 둘 나가기 시작하고 영훈이도 가게 정리를 하는 것 같다. 내 옆의 남자는 어느새 취했는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그 남자와 나를 마지막으로 내보내며 가게 문을 닫은 영훈이는 날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영훈의 집과 우리 집이 반대편이기 때문에 혼자 가겠다고 하는데도 굳이 영훈이는 날 조수석에 태운다. 집으로 가는 동안 영훈이가 무언가 말을 하는 거 같은데 잘 들리지가 않는다. 표정이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거의 맨발인 채로 급하게 뛰어나온다. "제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오늘따라 가게에 손님이 많아서……." 영훈이가 나를 부축해 내리며 고개를 숙인다. 이상하게 영훈이도 아내도 둘 다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니에요, 제가 늘 죄송하죠. 매번 폐만 끼치고……. 집에 있는 술을 다 치워 놓으니 더 밖으로 도는 거 같아요. 의사 선생님도 밖에서 마시는 건 본인 의지 외엔 어쩔 방도가 없다고……." 아내와 영훈의 대화소리가 점점 희미해진다. 하루의 피로를 다 풀자 슬슬 잠이 오는 것 같다.
 

Posted by d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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