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일기

2023. 6. 2. 19:59

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건 책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내 방에 꼭 알맞은 깔끔하고 앙증맞은 하얀 책상이 있어야 그 위에서 나의 핑크 노트북을 열 수 있고 그제야 일기를 쓸 수 있을 거라고. 책상 없이는 일기를 쓸 마음이 안 생긴다고.

며칠째 트위터며 당근이며 유튜브에 책상, 최화정 책상, 빈티지 책상, 같은 검색어를 쳐 넣고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은 비싸고 눈을 낮춰볼까 해서 찾아도 여전히 비싸다. 그러면서 책상을 보겠다며 성수에 사무엘스몰즈, 오드플랫 알트를 찾은 건 무슨 배짱일까? 아무 배짱 아니다. 그저 현실 감각이 조금 떨어질 뿐. 조금은 붕 뜬 채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건 성실하고 꼼꼼한 나와 한 몸에 있는 역시 나의 자아다.

사무엘스몰즈에는 내 방에 꼭 알맞은 깔끔하고 앙증맞은 하얀 책상이 있었다. 정사각형 모양의 하얗고 단단한 상판을 굵고 반짝이는 크롬 다리가 받치고 있는데 다리가 상판의 각 모서리까지 올라와있는 것이 이 책상의 특징이다. 언뜻 보면 별 거 없고 또 언뜻 보면 찰나의 세련됨이 스쳐서 모서리에 조그맣게 붙은 마스킹 테이프 위 1,100,000이라는 숫자가 언뜻 나의 현실 감각을 가져간다.

이제 이 책상은 기준이 된다. 인스타의 사이다빈티지에서 무척이나 견고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원목 테이블을 발견했는데 98만원인 게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같은 값이면 훨씬 고급스럽고 전통 있고(있는지 모름) 무엇보다 원목인 이걸 사는 게 맞는 거 아니야? 벽에 붙이는 선반 시스템에 책상 하나가 붙어있는 모양새는 내가 아주 원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 또한 가격이 100만원 안팎이라면 나는 또 혼란에 빠지고 만다. 책상에 플러스 선반 선반 선반 서랍장이 붙은 이것이 같은 값이면 훨씬 더 실용적인 거 아닐까?

백십 만원이라는 가격에 온리 내 방에 꼭 알맞은 깔끔하고 앙증맞은 하얀 책상을 사는 게 정말 맞는 일인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맞고 틀리고가 어딨겠는가. 그저 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될 일이고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안 사는 게, 아니 못 사는 게? 맞는 일일 뿐. 그럼에도 자꾸 그 책상을 떠올리는 건 역시 현실 감각이 조금 부족한 탓이다. 일기를 쓰니 이렇게 명료한 것을. 역시 일기를 쓸 책상이 필요하겠어. 지금 일기를 쓰고 있는 이 책상에서 물론 일기를 쓰는 중이지만.

 

진로 고민을 하는 나에게 누군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법에 관한 책을 추천해줬다. 예스24에 따르면 그 책의 핵심은 잘 하는 일을 찾으라는 것 같은데(대강 훑은 거라 아닐 수 있음) 잘 하는 일을 찾는 건 참 어렵다. 그건 상대평가니까. 내가 숨을 잘 쉰다고 해도 세상 사람 모두가 숨을 잘 쉬는 한, 그건 잘 하는 거라 할 수 없다. 사뭇을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아주 조그마한 조각이라도 내가 잘 하는 영역이 있다면 뭘까? 하는 질문에 파트너도 나도 공간 꾸미기를 꼽았다. 그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칭찬 받은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인정이 없었다면 나는 내가 그것을 잘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여서 나에게 글 좋다고, 계속 쓰자고, 계속 썼으면 좋겠다고 해준 나의 친구와 파트너가 없었다면 나는 나의 블로그 밖을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타인에게 인정받을 만한 것, 인정받았던 것, 남들보다 잘 하는 일을 떠올리려 애쓰다 보면 나는 왠지 금세 지치고 만다. 수치심을 가진 사람에게 남들보다 잘 하는 것을 떠올리기란 객관적인 숫자 아니고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담. 예전부터 친구들은 내게 상담을 요청해왔다. 나와 이야기하면 머리가 정리된다고 했고,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들을 뿐이고 내가 궁금한 걸 물어보는 것 뿐이라서 늘 조금쯤 의아했지만 그 말들이 듣기 좋아서 가만히 있었다. 아니다. 듣기 싫을 때도 있었다. "나 요새 머리를 정리해야 해서 너랑 이야기 해야 돼. 네가 필요해." 하는 말은 싫었다. 아마 상대가 내 이야기를 들을 마음은 별로 없어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다. 그 전에 내가 그에게 내 이야기를 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 전에, 그가 남자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친구와 이야기 나누는 게 즐겁고 나의 집중력이 그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깨달음을 가져오는 건 내가 그에게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담자와 마주 앉으면 나는 어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는 조급함에 헐떡이게 되었다.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었다. 나는 잘 기다리지 못한다. 돈을 냈는데 50분 동안 뭔가 얻어가는 게 없다면 끝장이 나는 것이다. 그건 내가 상담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의 태도라서 몇 번 해보다 말아버렸다.

 

홍진경 유튜브에 엄정화가 나왔는데 그전에 최화정 편을 너무 재밌게 봐서(최화정이 입고 먹고 쓰는 모든 것, 하다못해 잠옷까지 다 갖고 싶었다. 가장 갖고 싶던 건 독특한 다리의 하얀 책상, 아니, 서울숲의 집.) 엄정화 편도 고민 없이 눌렀다. 책상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만큼 서재를 눈여겨 보았다. 임스인가, 의자가 예뻐 보였고 책상 다리가 크롬인 게 좋았다. 책장 한 귀퉁이에 트로피가 쌓여있었는데 연기자로서 받은 것두 개를 소개했고 나머지는 모두 가수로 받은 것들이었다. 본인을 배우로 잘 봐주지 않았다는 말에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떤 것들이야 대체! 정화 언니가 연기하는 걸 보고도 그래? 그 유동근이 기억 잃은 채로 사랑에 빠져서 나중에 두 번째 부인이 되는 드라마에서 눈물 줄줄 만드는 걸로 시작해서 결혼 못하는 남자에서 그 나이대, 그 상황의 여자의 대인관계에서의 입술 떨림까지 연기해내는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엄정화 언니가 말했다. 늘 마당 있는 집에 살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졌어. 말을 하고 봐야 하나 봐.

그런 의미에서 언니, 나도 마당 있는 집에서, 파트너는 1층 나는 2층에서 각자의 부엌과 화장실과 옷방을 갖고 살고 싶어요.

Posted by d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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