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일기

2023. 5. 1. 17:30

지금 하고 싶은 건 강릉행 기차를 잡아 타고 창가쪽 좌석에 앉아 책을 펼쳐드는 일이다. 기차는 한산하고 실내는 적당한 온도로 유지된다. 해가 밝아 조명이 없어도 책 속 글자를 읽을 수 있다. 가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휴대폰을 열어 독서 중 떠오르는 단상을 짧게 메모한다. 일상적인 혹은 일적인 메시지가 오더라도 읽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지킬 자신은 없다. 다행히 약한 자신을 지켜주듯 휴대폰은 울리지 않는다. 기차에서 내릴 때가 다가오면 이제사 책에 집중 좀 할랬는데, 하며 아쉽게 책을 덮는데 그러면 기차 안의 시간을 마지막에 가서야 진정 귀하게 느낀다. 

강릉역을 나서면 낯선 풍경과 또 조금은 비슷비슷한 지방의 기차역 앞 택시 정류장, 국숫집, 모텔 같은 간판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어디로 발을 떼볼까 이제서 궁리를 시작한다. 발걸음은 자연히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여 시내냐 바닷가냐 나른하게 고민하는 눈으로 버스 안내판을 훑는다. 그러다 먼저 오는 버스를 그저 잡아 타고 시내로든 바다로든 향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카페든 음식점이든 해변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미 여행은 진행 중이고 그속에 무슨 장소를 채워넣든 나는 이미 많은 걸 달성했고 여행이라는 것에 깊이 빠진 상태다. 그저 그 순간을 내 마음이 순수하게 느끼고 있기를 바랄 뿐. 전에 왔던 그리운 풍경을 애써 재현할 필요도 없고 그리운 추억을 애써 곱씹을 필요도 없다. 

 

자유로운 하루가 주어졌다. 같이 사는 사람이 나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도 아닌데 그가 집을 비웠다는 사실에 나는 자유를 얻은 마냥 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게 자유의 감각이라면, 그가 있는 일상에서도 꼭 움켜쥐어야지. 하지만 매일 같이 강릉행 기차를 타고 싶어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피곤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 감각을 일깨우는 일은 아주 소중한데, 나는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았고 강릉행 기차를 타고 싶다면 언제든 탈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점에서 그렇다.

 

자유가 주어진 오늘, 내가 강릉행 기차를 타지 않은 건 피곤해서다. 기차를 타러 가려면 타야 하는 버스와 지하철 등등의 생각에, 기차에서 내려 두리번거릴 때 햇빛이 눈을 찌를 것이고, 갈 길을 찾는 내 발에는 불편한 운동화가 달려있을 것이고, 가게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으면 거기 앉아있는 사람들 중 혼자는 나뿐이라 집중이 안 될 것이고, 바닷가에 갔다가도 금방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가 휘날려 피곤해질 것을 다른 좋은 순간들보다 먼저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꾸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왤까? 이유는 알려 하지 않겠다. 알아봤자 해결할 수 없는 이유일 것 같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해봐야겠다. 치우친 예측을 지울 수 있는 건 실제 경험 밖에 없다. 여행이 좋다면 당연히 해결이고 여행이 나쁘다 해도 나의 편견과 아주 다른 나쁨일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예측은 폐기될 것이다. 물론 경험이 나쁘다면 또다른 편견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건 또 그때 가서 해결해야지 뭐. 

Posted by d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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