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2010. 1. 4. 18:00

 나는 드라마를 믿지 않았다.

 내게 있어 드라마는 현실도 허구도 아니었다. 현실인 척 사람들을 꾀어내지만 정작 현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얘기하며 그에 대한 주인공들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지만 그들은 너무 쉽게 문제를 해결했다.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불가능할 정도로 긍정적이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 또한 비현실적으로 단순했다. 진짜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그것도 운 좋게 남은 일을 떠맡지 않을 때에나 나는 겨우 저녁 드라마 할 시간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들어서면 하루 종일 비어 있던 집 특유의 적막함과 불을 켜도 쉽게 가시지 않는 어둠의 흔적을 쫓으려 티비를 켜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의 버릇이었다. 티비 앞에서 반찬 한두 가지와 식은 밥을 데워 늦은 끼니를 해결하고 있노라면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이 그렇게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형편이 어찌 됐든 그들은 가족과 함께 상에 앉아 밥을 먹을 수 있고 곁에 의지할 사람 하나 정도는 있으며 먹고 사는 일 외에도 다른 일에 눈 돌릴 여유가 있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울며불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이 끝날 것처럼 구는 것을 볼 때면 구역질이 나서 허기진 배조차 채우다 마는 일이 많았다. 나에겐 그들의 모든 행동이 감정의 과잉, 시간의 사치처럼 보였던 것이다. 차라리 진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인 뉴스를 보는 것이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그러던 내가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것은 그 사람을 만나고부터였다.

 그는 나와 같은 고시원의 2층에 사는 청년이었다. 집 근처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그가 아래층에 사는 것은 최근에 알게 되었다. 주로 퇴근이 늦으니 근처의 할인마트는 모두 문을 닫아 컵라면이며 휴지 등을 살 만한 곳은 편의점뿐일 때가 많았다. 알바생인 그와 얼굴은 어느 정도 익혔으나 자정 넘어 퇴근하던 날, 근무 교대를 하고 편의점을 나선 그가 내 뒤를 쫓아왔을 때는 겁이 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오는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같은 고시원에 사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뒤로 퇴근 시간이 맞을 때면 편의점에 들러 그와 함께 집까지 걸어오곤 했다. 공통점이 많은 그와 나는 서로의 처지를 잘 이해했고 또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오로지 나 혼자 이 세상을 견뎌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내게 그는 희망을 주었다. 나도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남들처럼 휴일엔 나들이도 가고 언젠가는 아담한 집을 마련해 사랑하는 사람과 미래를 설계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
 그때부터 드라마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드라마 주인공에게 감정이입도 해보고 나도 저런 프러포즈를 받고 싶다고 기대도 하고 난 나중에 엄마가 돼도 자식에게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도 하면서 말이다. 여전히 드라마는 내게 현실이 아니었지만 바라고픈 현실이 되어갔다. 드라마는 날 꿈꾸게 했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함께 즐거워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드라마를 보지 않았던 건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을 부러워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던 것이다.



    
Posted by d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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