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과 아날로그

2009. 9. 21. 13:20


 "너의 디지털식 관계 맺기, 이젠 지친다." 아마 그를 향한 내 마지막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직 0과 1로만 이루어진 디지털처럼, 모든 것이 정확하고 깔끔했다. 생활방식, 일처리, 우정이나 사랑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그의 결정은 명확했고 그에게서 애매모호함이나 우유부단함을 찾기는 어려웠다. 대부분의 관계가 그렇듯이 처음엔 나와 다른 그런 점에 끌렸고 나중엔 그 점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처음 만난 그는 마치 미니홈피의 방명록처럼 쉽게 내게 마음을 전달해왔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고 내 마음을 전달하는 데 조심스러운 나와 달리 거리낌 없이 먼저 손 내밀어 주는 그에게 난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전한 마음은 딱 그만한 크기의 가벼움인 걸 나는 알았어야만 했다. 내 마음은 단 한 줄의 문장을 전하려 해도 편지지를 사고 손으로 글씨를 쓰고 봉투에 주소를 적어 우체국에서 우표를 사고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야 하는 길고 정성스러운 절차가 필요한 아날로그였다면, 그의 마음은 단 몇 번의 타자 두드림만으로도 표현 가능한 디지털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언제나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확인하듯이 나에게 즉각적 반응을 요구했다. 그의 제안이나 표현에 늘 신속한 응답이나 호불호에 대한 답변을 해야 했고 그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에 비해 호불호가 명확하지 않고 결정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나에게 그는 생각이 너무 많은 게 탈이라며 핀잔을 주기 일쑤였고 나는 늘 그의 페이스를 쫓아가기 급급했다. 그에겐 여유를 갖는 시간조차 스케줄에 정확히 분 단위로 계획되어져 있을 만큼 모든 것이 신속하고 명확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들은 모두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를 가장 지치게 했던 것은 디지털 시계와 같은 그의 만남관(觀)이었다. 그에겐 모든 것이 0 또는 1인 것처럼 시간 또한 그렇게 나뉘어졌다. 나를 생각하는 시간 또는 생각하지 않는 시간. 이는 나를 만나는 시간 또는 만나지 않는 시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은 연속적이지 않았다. "나를 만나지 않는 시간에도 내가 너랑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는 거, 생각하긴 하니?" 나의 서운한 마음을 담은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늘 같았다. "나는 순간에 충실한 거야. 지금 현재가 나한텐 가장 중요해.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너만을 생각하는 거고." 또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와 만나고 있지 않을 땐 늘 외로웠고, 이는 그를 만나고 있는 순간에도 날 외롭게 만들었다. 그에게 2시 42분과 43분 사이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Posted by d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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