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고 남기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그런데 도통 머릿속에서 글로 만들어지질 않아 삼키고만 있었다. 삼키고 삼킨 말들이 뜨거운 열기를 훅훅 낸다. 지금 이 흰 화면 위에 그 태양을 뱉어놓으려는 건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그저 입으로 후후 불고 손을 휘휘 저어 열기만이라도 가실 수 있다면. 

 전엔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면 숨 쉬는 지점마다 줄을 바꾸고, 말을 중간에 끊어 여운을 남기고, 번호로 내용을 전환했다. 줄임표에 감정을 담고 접속사 대신 번호를 붙이는 게 더 나를 잘 표현해주고 독자 입장에서도 읽기 편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온전한 문장과 문단이 아닌 생략과 번호로 손쉽게 대체한 방법이었다. 덧붙여 약간의 허세도 함께. 물론 이런 날탱 마음만 있던 건 아니니까 위와 같은 방법을 전혀 안 쓰겠다는 건 아니고 되도록이면 '제대로 된' 글을 써야겠다는 거다.

 참 별 얘기 아닌데도 모니터 앞에 앉아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만들고 있자니 예의 그 태양이 한 5도쯤 온도가 내려간 것 같다. 책상 앞에는 제주도 하늘에서 바람에 떨고 있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의 사진이 있다. 흔들리면서 가자고, 뿌리는 단단히 박되 가지와 잎사귀는 바람결에 따라 흔들흔들 춤추는 게 건강한 나무라고 떡하니 걸어놓고는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흔들릴까 봐 조마조마해한다. 


 여행지에서의 나처럼 살고 싶다. 그곳에서는 하루가 소중하고 한 시간이 아까워 전날 저녁부터 내일을 어떻게 충만하게 보낼지 연구한다. 목적지에 가고 숙소에 돌아오는 교통편만 확실하면 눈을 뜨고 땅을 밟는 순간부터 '케세라세라, 카르페디엠'이다. 그렇게 내딛는 나의 매 발걸음이 의미가 되고 내 눈에 비치는 거의 모든 것들이 감탄이 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을 나서는 것이 힘들지 않고 집에 돌아와서 컴퓨터, TV, 휴대폰이 없어도 심심하지 않다. 잠자리와 짐은 단순할수록 좋다. 하루가 참 길고 또 짧다.

 집에 돌아오니 아빠의 첫 마디가 "그래, 목적 달성은 하고 온 거니?"였다. 아빠에게 반론하려면 수많은 논리와 근거를 며칠씩 찾아야 하는 겁 많은 완벽주의 딸은 그 자리에서 희미한 웃음으로밖에 답할 수 없었지만, 그 어떤 근거를 찾더라도 내 결론은 같다. 여행은, 그냥 가는 겁니다. 목적 같은 건 없어요. 여행의 목적은 바로 '가는 것'이에요, 아빠.



Posted by d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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