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육번 출구

2009. 9. 14. 12:54


 덜컹덜컹. 덜컹덜컹. 2분마다 사람들을 삼켰다 뱉어냈다 하는 지하철 안에서 창문너머로 보이는 나는 서 있기도 힘들다는 듯 손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까만 창 속의 나는 얼굴마저 흙빛이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지쳐 보이니' 그러나 창문 속의 나는 말이 없다. 오늘 같은 날은 얼른 집에 돌아가 따뜻한 샤워, 시원한 캔맥주와 TV 시청이 필수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지금 같은 표정을 자주 지었던 그 애가 떠올랐다.
 
 "너무 힘들고 답답해서 숨어버리고 싶은 그런 날 있잖아, 그럴 때 난 강남역 육 번 출구에 가. 그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으면 모든 사람이 날 볼 수 있지만 결국 아무도 날 보지 않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 애의 말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퇴근길 도중 강남역에서 내려 버렸다. "넌 정말 독특하다니까. 이렇게 북적대고 시끄러운 곳에 숨는단 말이야? 난 강남역에만 오면 괜히 기분이 들뜨고 신나던데." 그 애는 내 말에 빙긋 웃었던 것 같은데 지금 떠오르는 그 애의 미소는 왜이리 쓸쓸하게 느껴지는 걸까.

 늘 그렇듯이 사람들로 붐비는 육 번 출구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 왠지 오늘은 그 애의 마음이 느껴질 것 같다. '넌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외로웠던 거구나. 나는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이 사람들과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오로지 혼자 걸어가고 있었구나. 너의 짐을 혼자 짊어지고 버거워하며 그리 자주 숨고 싶어했던 거구나.' 그 애의 외로움을 눈치채지 못했던 날 그 애는 결국 떠나 버렸고 많은 사람들 사이로 영영 숨어 버렸다.  

 그 애를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이제는 그 애의 미소 뒤에 숨은 쓸쓸함을 보듬어줄 수 있을 텐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도 둘이 함께라면 덜 외로울 수 있을 텐데. 그러다 문득 거리의 수많은 발걸음들이 결국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것, 타인의 체온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수백 개의 외로움들이 모여 있는 강남역 육 번 출구에서 나 또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그에게 위로 받기 위해, 또한 그 누군가가 다시 그 애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하나의 발걸음을 옮긴다. 
  

 

Posted by d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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